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사의 난 (문단 편집) ==== 전후 처리 ==== 763년 윤정월[* 1월은 1월인데, 중국 사서에서는 음력을 쓰다보니 '''윤달이다.'''], 당은 전란의 종결을 확인하고 전후처리에 들어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안녹산과 사조의 측에 붙었던 절도사들에 대한 처우였다. 당 조정은 이에 대해 '''원래 관장하던 지역을 대부분 인정해 주면서 용서하는''' 유화책을 사용했다. 이는 반란 진압에 당의 국력이 심각하게 소모되었던 데다가 사사명의 아픈 기억 때문인 걸로 보인다. 19일, 당 조정은 설숭을 상·위·형·명·자 6주 절도사로 삼고, 전승사를 위·박·덕·창·영 5주 도방어사로 삼았으며, 이회선은 유주·노룡 절도사로 임명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사조의가 임명했던 연나라의 번진의 이름을 바꾼 셈이므로 이는 이들이 항복하기 전에 절도사로서 지배하던 지역을 거의 그대로 인정한 것이었다. 거기다 이들의 항복을 받은 복고회은도 이들이 재반란을 일으킬 경우 반란을 평정한 자신의 공로가 퇴색할 것을 우려해 이들의 통치권을 인정해줄 것을 당에 요청함과 동시에 스스로 이들의 후원세력으로서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또한 번진 병사들이 절도사를 제멋대로 세우는 관행도 꾸준히 이어졌는데, 산남동도절도사 내진이 비명에 간 후 그 휘하의 제장이었던 행군사마 방충이 군을 움직여 양주를 습격하는 등 도적화할 모습을 보이자 좌병마사 이소와 부사 설남양이 군을 이끌고 이를 막았다. 그런데 휘하 병사들이 우병마사 양숭의를 지휘관으로 추대한 후 이소와 설남양까지 죽여버리고 말았다. 이는 반역이지만 당 조정에서는 이에 대해 진압은 커녕 손을 쓸 수도 없었으며, 결국 양숭의를 양주자사·산남동도 절도유후로 사후임명하고 말았다. 4월 27일, 이광필이 '원조를 사로잡고 절동을 모두 평정하였다'는 주문을 올렸다. 5월 25일, 당 조정은 하북의 여러 주들을 나누어주었다. 유주·막주·규주·단주·평주·계주는 유주에서 관장하여 '''노룡절도사'''로 삼고, 항주·정주·조주·심주·역주는 성덕군에서 관장하여 '''성덕절도사'''로 삼았으며, 상주·패주·형주·명주는 상주에서 관장하여 '''상위절도사'''로 삼고, 위주·박주·덕주는 위주에서 관장해 '''천웅군절도사'''로 삼았으며, 창주·체주·기주·영주는 '''평로번진'''에 더하여주고[* 이로써 평로치청번진은 총 10개의 주를 관장하게 되었다.] 회주·위주·하양은 '''택로번진'''에 더하여 주었다. 이를 통해 하북의 모든 지역은 절도사들이 관장하게 되었으며, 이는 여타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그 외에, 763년 7월에는 연호를 '광덕'으로 고쳤으며, '보응원성문무효'라는 존호를 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